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 최씨 (문단 편집) ==== 토최설을 뒷받침있고 있는 근거들 ====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의 기록을 곧이 곧대로 신뢰하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계에선 혜소나 형미 등 '중국계를 자처한 전라도 출신'들이 실제로는 중국계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인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 유민들을 남원경(南原京)으로 집단 이주시켰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남원시]] 일대다. 고구려가 망한 후 신라에 대항해 [[고구려부흥운동|부흥운동]]을 벌였던 [[보덕국]]의 근거지는 남원경 인근의 금마였으며, 보덕국은 남원경으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들을 주축으로 활동했다. 학계에선 신라에 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이 상류사회로 진출하는 방법은 승려가 되는 것이었고, 혜소나 형미 등은 고구려 유민으로 받게 될 차별대우를 피하고자 중국인의 후예를 자칭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는 [[후삼국시대]] 활동한 승려 현휘(玄暉)와 경유(慶猷) 등이 있다. 현휘는 [[노자]]의 후예를, 경유는 한족의 후예를 자처했다.[* 출처: 임병태 숭실대 사학과 교수, <新羅小京考>, 1967년.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신라 하대 선종 구산파의 성립>, 1972년] 아울러 진감선사탑비와 선각대사탑비의 기록만을 근거로 삼아 '전주 등 전라도에 살았던 기록이 있는 최씨라면 모두 북방계통에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김헌창의 난]]과 관련해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의 기록이 실려 있는데, 최웅은 경주에서 전주로 파견된 관리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18일에 완산주 장사 최웅과 주조(州助)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왕경(王京)으로 도망해 와 그 일(김헌창의 난)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級飡)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太守)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湌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即授崔雄位級湌 速含郡太守 令忠位級湌) 통일신라 시대 장사와 주조란 지방행정 조직인 주(州)를 다스린 도독을 보좌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에선 도독을 포함해 장사와 주조 등 지방행정을 담당한 외관은 모두 중앙으로부터 임명·파견됐다.[* 출처: 이문기 경북대 사학과 교수, <통일신라의 지방관제 연구>, 1990년.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고대사연구소 연구실장, <신라시대 漢山州에 대하여>, 2005년] 최웅은 전주에서 지방관을 지냈으나, 전주 토착민이 아니라 경주 사람으로 전주에 파견돼 살던 인물인 셈이다. 또 조선 후기 [[실학]]을 연구한 [[서유구]]는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에 '교인계원필경집서(校印桂苑筆耕集序)'라는 서문을 썼는데, 여기서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가 아니라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옥구]] 일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유구의 글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이며 고운은 그의 호이다. 호남의 옥구 사람이다.(公名致遠 字海夫 孤雲其號也 湖南之沃溝人) 교인계원필경집서에는 서유구가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로 상정한 자세한 이유에 대해선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 정신을 내세웠던 서유구가 최치원의 출생지를 옥구로 상정한 것을 보면 1800년대 무렵 전라도 일대엔 경주에서 이주해 온 사량부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나 문화재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